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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동 위치안내

덕진동 (德津洞, Deokjin-dong)

조선시대 초기 공주군 탄동면의 지역으로서, 고려때 덕진현이 있었으므로 덕진이라고 하였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회덕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안기리 일부를 병합하여 덕진리라 하고 대전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 1970년대 대덕연구단지가 조성되면서,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가 깃들어 있는 덕진마을과 향교촌이 없어졌다.조선시대 초기에 무인으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양장공, 우공의 생장지이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한 한의사 출신 김동신의 출생지로서, 옛부터 기백이 넘치는 인물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추목동 (秋木洞, Chumok-dongg)

조선시대 초기에 공주군 탄동면의 지역이었다. 금병산 아래에 있으며 갈나무가 많으므로 가래울 또는 추목동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 말기에 회덕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방축리, 세동, 탄동을 병합하여 추목리라 하고 대전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 1925년 이상룡이 수운교를 창설하고 금병산 아래에 수운교 천단을 세웠다. 1927년부터는 수운교의 본거지가 됨에 따라 이 지역도 더불어 번창하였다. 1990년대에는 삼군대학, 간호사관학교, 기무사등 대부분의 지역에 군사시설이 들어서 자운대로 더 많이 알려졌다.

방현동 (芳峴洞, Banghyeon-dong)

조선시대에 공주군 탄동면 지역으로 덕진산성 아래쪽에 있으므로 안말 내동 또는 방고개, 방아고개, 방현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 말기에 회덕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대전군 탄동면 내동리가 되었다. 1989년 1월 1일에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대전직할시 유성구 방현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백제시대 소비포현이 있었던 적오산성 안쪽의 지역이었으며, 사람들의 이동이 잦았던 고려시대 말기부터 조선시대 초기에는 지금의 방현동 가마골 골짜기에 피난지로 유명했던 가마골이라는 큰 마을도 있었다.6 · 25 동란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와서 무사히 지냈다고 한다.

화암동 (花岩洞, Hwaam-dong)

조선시대 초기에 공주군 탄동면의 지역이었다.조선시대 초기부터 이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이 부근에 꽃이 아름답게 피는 바위가 있으므로 그 바위를 꽃봉바위라 부르고 그 아래쪽에 마을이 들어서면서 이 마을을 꽃바위 또는 화암이라 하였으며,조선시대 말기에 회덕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설목리와 구즉면의 상동리, 고촌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전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 1973년 11월 14일에 화암동의 남쪽을 관통하는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신봉동 (新峰洞, Sinbong-dong)

조선시대에는 추목동, 신봉동, 자운동을 숯골이라고 불렀다.조선시대 초기에 공주군 탄동면의 지역으로서 금병산 아래에 자리하여 높은 산이 둘러 싼 골짜기가 되므로 새울 또는 신봉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말기에는 회덕군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사동, 중방리, 방축리를 병합하여 신봉리라 하고 대전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 1959년 4월에 단군교의 천당이 들어섰다. 단군을 모시는 천당으로 매년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단군을 숭앙하며 제향을 올렸다 한다.

자운동 (自雲洞, Jaun-dong)

동쪽으로는 백운, 북쪽으로는 청운, 남쪽에는 자운(紫雲)의 삼운사이에 마을이 있다 해서 사람들이 살기 좋은 땅으로 알려졌다.조선시대 초기에 공주군 탄동면에 속해서 잔 산 아래에 있으므로 잔골 또는 자은동(慈恩洞)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말기 회덕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삼현리, 입석리, 중방리 일부를 병합하여 자운리라 하고 대전군 탄동면에 속하게 되었다. 1950년 6 · 25동란 후에는 이북에서 온 피난민들이 집단으로 들어와 농사를 짓고 정착한 마을이기도 하다.지금은 군사시설인 자운대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장동 (長洞, Jang-dong)

조선시대 초기에 공주군 탄동면의 지역으로, 장자(長子)가 살았던 지역임으로 장자골, 장자울, 장동이라고 부르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회덕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정삼리, 상초리, 신대리, 세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장동리라 하고 대전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 옛날부터 기름진 경작지로 유명했던 장동일대는 경작지가 넓어지면서 마을이 여러 곳에 생겼으나, 자작농에 따른 농가보다도 소작농가가 많았던 곳이기도 하다.1978년 이후에 대덕연구단지 구역이 되어 많은 연구소가 입주하였다.

도룡동 (道龍洞, Doryong-dong)

도룡동은 유성구의 동쪽 갑천변에 위치한다. 남쪽에서 대덕대교를 지나 갑천을 넘어서면 현대적인 과학공원인 대전엑스포과학공원이 웅장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엑스포공원 자리에 장사배, 고기배, 소금배등이 갑천으로 들어와서 짐을 풀던 선착장과 배가 닻을 내리는 선창이 있었다 해서 선창말이라고 부르던 마을이 있었다 한다. 조선시대에 공주군 탄동면의 지역으로 뒷산의 모양이 도룡용과 같으며 산의 모양새 또한 용이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하여 도롱 또는 도룡이라 부르던 곳인데, 조선시대 말기에는 회덕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경운리, 호동과 서면의 상신리 일부를 병합하여 도룡리라 하고 대전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

가정동 (柯亭洞, Gajeong-dong)

가정동의 동쪽에는 넓은 강 폭의 갑천이 멋있는 운치를 만들어 주며, 서쪽에서 흘러오는 탄동천의 하구에서는 옛날 한여름철에 낚시질하는 풍류객들이 많았던 곳으로 유명하다.선시대에 공주군 탄동면에 속해서 마을에 가정 또는 가정자라고 부르는 정자가 있으므로 가정리 또는 가정자라고 하였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회덕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백산리, 호동, 하초리, 상초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가정리라 하고 대전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그 후 대덕연구단지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가정동은 연구단지에 자리잡은 도시의 일각이 되었다.

신성동 (新城洞, Sinseong-dong)

조선시대 초기 공주군 탄동면의 지역으로 산이 성처럼 둘러쌓았으므로 삼성이 또는 신성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 말기에는 회덕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숙당, 상초리, 율정리, 신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성리라 하고 대전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 신성동이 오늘과 같은 연구단지의 일각으로 변하여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73년 1월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곳에 연구학원도시를 건설하면서 새로운 연구단지를 조성한다는 계획이 발표되면서부터 이다. 1984년 3월달에 인삼연초연구소가 들어서고 각종 연구기관이 들어서면서 부대시설로 종합운동장이 들어섰으며, 증가하는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신성동의 면모은 완전히 변모해 갔다.

하기동 (下基洞, Hagi-dong)

조선시대 초기에 공주군 탄동면에 속하여 원내 텃골 아래쪽에 있으므로 아래텃골이라 부르던 곳이 그 유지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송림리, 봉기리, 상기리를 병합하여 하기리라 하고 대전군 탄동면에 편입되었다.현재 관할 행정동이 노은2동과 신성동으로 나뉘어져 있다. 조선시대에 한 장자가 이 곳에 터를 잡고 살았는데 텃세를 단단히 하여 외지사람들이나 이 곳에 사는 사람들도 그의 땅은 밟지도 못하고 얼씬도 못하였다 한다. 그의 텃세가 대단했던 곳의 마을이라 하여 텃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위텃골과 아래텃골로 나뉘어져 있으며, 아래텃골이 있는 쪽으로 1973년 11월 14일 개통한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한화 대전공장과 경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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