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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민동 위치안내

전민동 (田民洞, Jeonmin-dong)

연혁(沿革)

역사적으로 전민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로 회덕에서 공주로 가는 큰길에 편의시설로 정민역(貞民驛)이 있어 정민말로 불리다 변하여 전민으로 되었다 한다. 기록으로 보면 백제때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때는 공주부에 속했었다. 조선말기(1895년)에는 회덕군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정민리, 탑립리, 청유리 일부를 병합하여 전민리라 하고 대전군 구즉면에 편입되었다. 그후 1983. 2.15 대전시 중구에 속했다가 1984. 9. 1부터 대전시 직할 유성출장소 관할지역이 되었고 1995. 1. 1 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 전민동이 되었다.조선영조 36년(1760년)에 발간된 여지도서의 기록을 보면 전민동에는 113호, 331명이 살았고 1981년의 기록에는 159호 864명이 거주하던 작은 마을로 이곳은 1990년대에 들어와 각종 연구기관이 들어서고 ’93대전 엑스포박람회를 치르면서 대규모 엑스포아파트등이 들어서면서 탈바꿈했다.

고적(古蹟)

  • 정민역지 : 조선시대 역말인 정민역이 있던 역터로 처음에 산소골에 있었으나 조선 효종때 역벌로 옮겨 조선시대 말기까지 존재했다. 회덕읍지에는 정민역에는 대마1필, 장마4필, 복마3필, 역리 31명이 있었던 큰 역말이라 적혀있다. 김반(金般)의 묘와 신도비 : 전민동 산 18-1번지에 조선시대 대학자 사계 김장생(紗溪 金長生)의 막내아들 김반의 묘가 있다. 김반은 병자호란때 왕을 호종한 공로로 대사간과 대사헌, 이조참판의 벼슬을 했다. 비문의 찬자는 김상헌이고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
  • 민속놀이 : 산소골 상여놀이

지명(地名)

  • 다루고개 : 전민동 역벌마을에서 탑립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마루처럼 고개가 이루어졌다하여 마루고개로 불리다가 변하여 다루고개로 부른다.
    정민들 : 조선시대 이곳에 있었던 정민역의 역탑이 있었던 들이라 하여 정민들, 정민평이라 부른다. 지금 엑스포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 청류동 : 역벌마을 북쪽으로 있는 마을로 수양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청류동으로 부른다.
    기타:전민동의 면적은 4.133㎡이고, 초등학교 1곳, 중학교 2곳, 고등학교가 있으며 대덕연구단지 골프장과 수자원연구소 연수원을 비롯한 19개 기업연구소 및 벤처기업이 있다.

문지동 (文旨洞, Munji-dong)

  • 문지동 : 동으로는 갑천을 사이에 두고 회덕과 이웃하고 있으며 서로는 화암동, 남으로는 원촌동, 북으로는 전민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낮은 산기슭에 있으므로 민마루 또는 문지(文旨)라 하였다.조선 때 이 마을엔 한문선생이 두사람 있었다 하는데 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한다. 글월문자(文) 맛지자(旨)를 따서 문지(文旨)라 불렀는데 ‘민마루’라고도 부른다. 남원(南源) 양씨(梁氏)와 신창(新昌) 노씨(盧氏)가 성(姓)의 주류를 이루었고 과수원이 많이 있었다. 지금은 옛 마을이 완전히 없어지고 그 터에는 연구소들이 들어섰다.
  • 가맛골 : 민마루 북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전에 그릇가마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형국이 말처럼 생겼다 하여 가마를 끌고 가는 말과 같다 하여 가맛골이라 부른다.
  • 배거니 : 문지동 앞산의 둘레를 배거니라고 부른다. 옛날의 이곳으로 갑천이 흘렀으므로 배를 타고 건너가야만 되게 되어 있어 배를 매달아 놓는 곳이라 하여 배거니라 부렀다 한다. 배(나룻배)를 보내고 맞이하던 마을로 지금은 없어졌다.
  • 승류골(谷) : 백산고개로 넘어가는 좌측 골짜기이다. 문충공 사암 박순(文忠公 思초 朴정) 유허비화 사당이 있으며 이를 관리하는 집 한채가 있다. ‘비풍에서 서쪽으로 오리되는 숭림동(崇林洞)’이란 귀절로 보아 ‘숭림동’이 변하여 승류동이 된 것으로 보인다.
  • 행결(행절) : 민마루 서쪽에 있던 마을로 행결산 밑이 된다. 살구나무가 많이 있어서 ‘행정’이라 이름지어 부르던 것이 변하여 행절이라 부른다 한다.

원촌동 (院村洞, Wonchon-dong)

연혁(沿革)

원촌동은 백제시대에는 우술군에, 고려때는 공주부에 속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숭현서원이 있으므로 서원말, 원촌동이라 부르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원촌동과 방축리, 문지리 일부를 병합하여 원촌리라 하고 대전군 구즉면에 편입됐다. 그후 1983.2.15 대전시 지역확장에 따라 대전시 중구에 편입되고 1989. 1. 1 대전직할시 유성구에 속하고 1995. 1. 1 대전광역시 유성구 원촌동이 되었다.

지명(地名)

  • 옻밭골 : 원촌동 방죽골 안쪽에 옻나무가 많았던 골짜기라 옻밭골이라 하는데 변해서 오빠골이라고도 부른다.
    서원말 : 마을에 숭현서원이 있으므로 서원말 또는 원촌, 선말이라고 부르다가 변해서 서원동이라고도 한다. 서원진 나루 : 옛날에 원촌동에서 회덕으로 건너다니던 나루를 서원진 나루라고 불렀다. 지금의 원촌교 부근에 있었는데 회덕에서 공주로 드나들거나 서쪽으로 가는 나루로 풍치가 아름다워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던 유명한 나루터였다.

고적(古蹟)

  • 숭현서원(崇賢書院) : 원촌동에 있는 서원으로 대전시 기념물 제27호이다. 조선시대 충신인 김정·정광필 ·송인수 세분을 모시던 사우로서 삼현서원이라 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1609년에 지금의 장소에 다시 세웠으며 나라로부터 ‘숭현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후 이시직·송시영·김장생·송시열·송준길을 배향하여 모두 여덟분을 모셨으므로 팔현모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 지역 학문의 중심지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고 묘정비만 남았으나 근래에 다시 복원되었다.
  • 영귀대(詠歸臺) : 회덕융지의 기록으로는 숭현서원의 문루로 영귀대가 있다 하였고, 넓은 들과 갑천의 풍치를 보고 많은 문객들이 찾았던 누각이었다 한다.
  • 기타 : 원촌동의 면적은 2,143㎡이고, 주요기관으로는 대전시 시설관리공단, 하수종말처리장, SK대덕중앙연구소, 원촌직업전문학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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