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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 어원(유성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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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유성구 영역 안에는 “유성(儒城)”을 비롯하여 “진잠(鎭岑)”과 “덕진(德津)”이라는 3개의 옛 지명이 있다.유성이라는 지명은 백제시대의 ‘노사지(奴斯只)’가 통일신라시대에 ‘유성’으로 개정된 이래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되었고,진잠이라는 지명은 백제시대의 ‘진현(眞峴)’이 통일신라시대에 ‘진령(鎭嶺)’으로 바뀌었다가 고려초기에 또다시 ‘진잠(鎭岑)’으로 바뀌었으, 덕진이라는 지명은 백제시대의 ‘소비포(所比浦)’가 통일신라시대에 ‘적오(赤烏)’로 바뀌었다가 고려초기에 ‘덕진(德津)’으로 바뀌었다.
    유성의 어원을 살펴보면 일명 ‘노질지(奴叱只)’로도 불린 ‘노사지현(奴斯只懸)’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유성(儒城)’으로 개명된 이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지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독하고 있다.
    노사지현(奴斯只懸) – 유성현(儒城懸) – 儒城(공주목 속현:公州牧 屬縣) 늣재.
    노사(奴斯) – 노(奴)의 음(音)은 “노”, 사(斯)의 음(音)은 “사”로 촉음차(促音借) 「노사(奴斯)」는 늦의 음차(音借)이다. 개정된 명칭인 유성(儒城)의 유(儒)는 훈(訓)이 이므로「느르」의 훈차(訓借)로 사용한 것이다.
      지(只) – 지(只)의 음(音)은 “지”로 「재」(현:峴·성:城)의 음차(音借)이다.

 

    따라서 노사지(奴斯只)를 풀이하면 늦(儒) 재(城) 즉, 유성(儒城)으로 개명(改名)된 것이라는 해설이다.
    또한, 노사지현은 백제의 전략적인 요충지로 백제의 부흥군이 신라군에 대항한 최후의 결전장이기도 하였다. 노사지현 주변에 6개의 성이 산재해 있었는데, 그 6개의 성 안쪽에 있다 해서 육성(六城)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유성(儒城)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으며,유학(儒學)에서는 백성들을 사민(斯民)이라고 쓰이는데 풀이해서, 큰 장터가 있어 사민(斯民)들이 유난히 많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유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백제가 신라에게 멸망한 후 백제의 선비 즉, 유신(儒臣)들이 이 고장에 집거(集居)하고 있던 성(城)이라 하여 선비의 성 – 유성(儒城)이라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이 유래에서 온 연유인지는 모르나 현재도 이 고장 유성에는 공장등이 비교적 없고 대학교와 연구기관이 밀집된 연구단지가 자리잡고 있어 많은 학자가 여기에 상주하고 있으니 명실상부한 유성(儒城)이라 할 수 있겠다.따라서 선비 · 학자의 고장으로 새롭게 의미가 부여되어 주민들의 인식이 이제는 거의가 그렇게 굳어졌다.

 

선사시대

 

구석기 시대

  • 유성일대의 지형을 보면, 대전 분지의 외곽에 표고 300~500m의 산지로 되어 있고, 하천 유역은 표고 40m내외의 충적지로 되어 있으며, 그 사이의 표고 50~100m에 해당하는 지대는 얕은 구릉성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유적은 구즉동에서 발견되었다

중석기 시대

  • 대전지방에서는 아직 이 시대의 유적 흔적이 보이지 않고 있으나 한반도의 상황이나 금강유역 성장리 유적으로 미루어 보아 앞으로 이 시대의 유적이 발견될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다.

신석기 시대

  • 기원전 6,000년 전부터 신석기문화가 시작되어 여러가지 변화를 거치면서 서기 1,000년정도에 끝이 나는데, 6~5,000년전까지를 조기, 5~4,000년전을 전기, 4~3,000년까지를 중기, 3~2,000년까지를 후기, 2~1,000년까지를 말기로 구분한다. 유적은 구성동과 갑천 유역에서 발견되었다.

청동기 시대

  • 이 시대의 가장 특징있는 유적으로는 고인돌을 들 수 있다. 
    우리 고장에서는 매장 부분이 지하에 있고 지표에는 커다란 뚜껑돌만 덮여 있는 남방식이 대부분이다.
    대전지방에는 약 20여개소의 청동기시대 유적이 확인되어 있는데 유성지역에서 3~4개소가 발견되었다. 
    신대동에서 집자리 유적이 발견되었으며, 구성동 기상청 부지에서도 유적이 보인다.

철기 및 원삼국시대

  • 한반도에서 청동기 제작이 활발해져 가는 기원전 4~3세기경이 되면 북에서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이 철기의 유입이다. 대전지방에서는 이 시기의 유적이 많지 않으나 최근에 조사된 구성동 유적이나 오정동, 송촌동 유적이 이 시기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삼한시대

  •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다. 마한은 54개의 소국(小國)으로 구성된 나라로서 경기, 호서, 호남지방에 자리했던 초기 국가(부족연맹체 국가)였다.

  • 마한의 54개 국가 중 옛 충남에는 13개의 연맹체가 있었다. 13개의 국가 중 대전지방에 위치했던 국가로는 신흔국이 있었다. 신흔국은 현재의 유성구 계산동과 학하동의 경계를 이루는 빈계산에 위치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보면 신석기시대 내지 청동기시대부터 마한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이미 대전의 서부지역 즉 유성지역에 인구취락체가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의 유성

삼국시대 대전은 백제의 영역이었다. 백제의 지방조직은 오방제(五方制 : 中· 東·南 ·西·北方)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대전은 그중 북방역인 웅진성(熊進城, 현 공주)에 속해 있었다.

백제시대의 대전지방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대로 군사요지였고, 우술군(雨述郡) · 노사지현(奴斯只縣) · 진현현(眞峴縣) 등 읍성을 배치하여 지방의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 이밖에 대소산성(大小山城)을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국경지대의 수비를 담당케 하고 때로는 이 곳을 중심으로 신라의 영토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대전지방은 당시 백제의 우술군, 노사지현, 소비포현, 진현현의 영역에 해당하는바, 《삼국사기(권36 지리5》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보면, 백제시대(지금의 회덕)에는 우술군이, 유성에는 노사지현이, 덕진에는 소비포현이, 진잠에는 진현현이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지방행정조직을 더욱 확장 · 강화하였는데, 당(唐)의 세력을 몰아낸 677년과 678년(문무왕 17년과 18년경)부터 687년(신문왕 7년)에 걸쳐 행정구역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9주5소경제로 신라말까지 계속되었다. 이 시기 백제 때 노사지현으로 불리었던 것이 유성현으로 개칭되었다. 대전 지명의 명칭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전지명의 명칭

백제시대 통일신라 현재
우 술 군(雨 述 郡) 비풍군(比豊郡) 회덕(懷德)
진 현 현(鎭 峴 懸) 진령현(鎭嶺縣) 진잠(鎭岑)
노사지현(奴斯只縣) 유성현(儒城懸) 유성(儒城)
소비포현(所比浦縣) 적오현(赤烏縣) 덕진(德津)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유성

  • 오늘의 충남지역은 신라 말기에 이르러 견훤과 궁예에 의해 분할점령되다가 왕건에 의한 통일 이후 고려의 영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현재의 대전지역은 고려 때 공주목(公州牧), 회덕군(懷德郡), 진잠현(鎭岑懸), 유성현(儒城懸), 덕진현(德津懸)의 옛 땅이었다.

     

    유성현은 고유성(古儒城)이라 부르는 월평동 산성(月坪洞 山城) 아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혹은 상대동 산성 아래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백제 때 노사지현, 신라 경덕왕 때 유성현이라 하고 비풍군의 영속으로 되었다. 고려 때는 처음부터 유성현으로 내려오다가 공주목에 속하게 되었다.

    진잠현은 현재의 유성구 원내동이 고려 때 진잠현의 자리이다.

    덕진현은 유성구 덕진동이 그 유지(遺地)이다.

     

    고려 때의 회덕군, 유성현, 진잠현, 덕진현의 영역은 행정상 공주목에 속하면서 현재의 대전광역시 영역과 거의 일치하였다. 그리고 이들 현의 읍치(邑治)는 모두 현재 대전시의 외곽지대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대전 개척의 축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향하여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유성

  • 태종 13년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을 때, 대전지역은 회덕군, 진잠현, 공주군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현재의 대전은 대체로 동구 · 대덕구가 회덕현에, 중구와 유성구의 일부가 공주군에, 서구는 대체로 진잠현에 속해 있었다..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행정구역상 큰 변동은 없었지만, 충청도는 고려의 양광도(楊廣道, 충숙왕 원년 제정)로서 대체로 서울[楊州], 광주(廣州), 부평(富平), 충주(忠州), 청주(淸州), 공주(公州), 홍주(洪州), 천안(天安), 원주(原州)방면이 그 관할지역이었으나, 공민왕 5년에 양주·광주 방면을 경기(京畿)로 환속하고, 태조 4년에 관찰사를 두어 충주에 감영(監營)을 두었다.

     

    현재의 충청도는 1598년(선조 31년)에 충청 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옮겨졌으며, 인조때는 도의 명칭을 공청도(公淸道), 충홍도(忠洪道) 등으로 개칭하였다.

    충청도는 우도(右道)와 좌도(左道)로 분리되어서 충청남도는 우도에 속해 있으며, 2주(二州)·9군(九郡)·22개현이 있었다.

    1895년(고종 32년) 13도제하에서는 충청남도에 37군이 속해 있었는데, 그중 공주군은 21면(面), 1592동리(洞理), 회덕군은 13면 392동리, 진잠군은 5면 60동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시기 유성은 공주군에 속해 있었다..

     

 

최근세

일제전후의 유성

  • 1910년 일제에 의한 병탄후 식민정책이 개시되면서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에 의한 우리나라 최대의 지방행정구역 개편이 단행되었다. 이때 종래의 회덕군 · 진잠군과 공주군의 일부를 합쳐서 대전군으로 신설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의 대전군을 보면, 회덕군의 외남(外南) · 내남(內南) · 유등천(柳等川) · 서(西) · 동(東) · 주안(周岸) · 북(北) · 천내(川內) · 일도(一道) · 탄동(炭洞) · 구즉면(九즉面)의 13개 면, 진잠군의 북 · 상 · 동면의 3개 면, 공주군 현내면(懸內面)의 장현(長懸) · 봉암(鳳岩) · 신흥(新興) · 장대(場垈) · 상대(上垈) · 서성(西城) · 운암(運岩) · 가락(佳樂) · 남작동(南作洞) 일부와 반포면의 동촌(東村) · 봉성(鳳城) · 수남(水南) · 어두우니[魚 韻]의 4개 리와 명탄면(鳴灘面)의 박산(朴山) · 계봉(鷄峯)의 2개리, 연산군 두마면의 광산(光산) · 동서암(東西岩)의 2개 리와 식한면(食汗面)의 정장리(丁壯理) 일부와 벌곡면(伐谷面)의 조동리(鳥洞理) 일부를 병합하여 대전군으로 신설하고, 대전군 밑에 대전, 외남, 산내, 유천, 동, 북, 유성, 탄동, 구즉, 진잠, 기성의 12개 면을 관할하게 하였다.

 

자치구이전

자치구이전의 유성

  • 1914년 대전군이 신설되고 대전군의 영역 속에 대전면을 비롯한 12개의 면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전면은 종래의 회덕군 외남면의 중심지역인 현재의 인동, 원동, 중동, 정동, 삼성동의 지역을 중심으로 설정되고, 회덕읍내에 있던 군청이 현재의 원동 동구청 자리로 이전하였다.
    1917년 10월 1일 면제(面制)가 실시됨에 따라 대전면을 지정면(指定面)으로 하였다.

     

    1926년 3월에는 구역 확장으로 외남면의 외천리(外泉里) · 신대리(新垈里) · 대동리(大東里) · 소제리(蘇堤里) · 연효리(連孝里)를 편입하였고, 이때 처음으로 대전 도시계획위원회가 발족되어 대전의 도시계획 사업이 실시되었다.
     
    1931년 4월 1일에는 부령(府令) 제 103호(1931. 3. 1 공포)로 대전면이 대전읍으로 승격되고, 그 해 6월 대전읍사무소를 현재의 원동에 있었던 군청 자리로 이전하였다.
     
    1935년 10월 1일에는 부령 제112호(1935. 9. 28 공포)로 대전읍이 대전부로 승격되면서 대전군은 없어지고, 대전부를 제외한 구역은 대덕군으로 개칭되었다.
     
    그후 1940년 11월 1일에는 외남면의 산소리(山所里) · 용방리(龍坊里) · 탁곤리(卓昆里) · 가양리(佳陽里) · 홍도리(弘道里)와 산내면의 석교리(石僑里), 유천면의 평리(坪里) · 유천리(柳川里) · 과례리(果禮里) 및 당대리(唐垈里)를 편입하였다.

 

현재

현재의 유성

  •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그 해 11월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 수립 때까지 3년간은 미국의 군정하에 있었다. 미군정 하의 대전은 종전의 대전부제를 그대로 존속하여 부윤(府尹)이 시 행정을 맡았었다.
     
    1949년 8월 15일 법률 제32호(1949. 7. 4 공포)로 지방자치법 실시에 따라 대전부를 대전시로 개칭하고 시 청사는 옛 대전 상공회의소 자리에 있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3호(1973. 7. 1 공포)로 유성면을 유성읍으로 승격시켰다.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1983. 1. 10)로 유성읍 일원이 대전시 중구 관할로 신설된 유성출장소에 편입되었다.
     
    1984년 9월 1일 시 조례 제1404호(1984. 9. 1 공포)로 중구 유성출장소를 시 직할 유성출장소로 승격시켰다.
     
    1988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 12367호(1987. 12. 31 공포)로 서구가 신설됨에 따라 유성출장소의 행정구역 구 명칭이 중구에서 서구로 변경되었다.
     
    1989년 1월 1일 법률 제 4049호(1988. 12. 31 공포)로 대전이 직할시로 되면서 유성구가 신설되었다.
     
    1991년 4월 15일 유성구의회 개원으로 지방자치시대가 개막되었다.
     
    1992년 3월 14일 구청의 신청사 준공식이 어은동 109번지에서 거행되었다
     
    동년 8월 27일에는 유성구를 비롯한 전국 5개 관광지를 정부에서 관광특구로 지정하여 각종 혜택을 부여하였다.
     
    유성구청 개청식(1989. 1. 6)
     
    1995년 1월 1일 대전직할시가 대전광역시로 개칭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유성구로 변경되었고,
    동년 6월 27일 기초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면서 구민이 직접 선거에 참여 지방자치시대의 새 장을 열었다.
     
    현재 유성구 관할하에는 진잠동, 온천1동, 온천2동, 노은동, 노은2동, 관평동, 신성동, 전민동, 구즉동등 9개의 행정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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