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file

․ 충남 예산 출생 (1965년)
․ 충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 전) 청와대 인사수석비서관실 행정관
․ 전) 과학기술부장관 정책보좌관
․ 전) 대덕연구개발특구 복지센터 소장
․ 전) 극동대학교 겸임교수
․ 전)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 전) 대통령자문 민주평통자문회의 상임위원
․ 현) 대전광역시 유성구청장

 

 

 

 

 

골목대장, 나눔과 배려로 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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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난 곳은 차령산맥 줄기인 충남 예산군의 조그마한 시골마을이다.
예산은 예당평야가 있는 들이 넓은 지역이지만 내가 태어난 대술면 송석리는 아산과 공주가 접한 산 깊은 곳이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전기가 들어 올 정도였으니 얼마나 산골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시골이지만 동네에서는 살림이 넉넉한 편에 속한 집이었다. 소위 시골부자라는 정미소와 목장을 운영했으니 먹고 가르치는 걱정을 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덕분에 6남매의 막내인 나와 형제들은 큰 고생 없이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밖에 나가려고 하는데 할아버지께서 조금만 있다가 나가라고 하시기에 ‘왜 그런가?’ 했다.
우리 집 주변에는 과일나무가 많았는데, 아침이면 떨어진 과일을 주우러 오는 동네 사람들이 꽤 있었다.
주인이 나오면 그들이 과일 줍는 것을 민망해 할까봐 일부러 나를 못나가게 만류하신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떨어진 과일은 이미 우리 것이 아니니 욕심내지 말라는 할아버지 말씀이 작고 소박한 것이지만 소유하고 있을 때 나누고자 하는 큰마음이었다는것을 지금에서야 조금 알 수 있다.

예산 촌놈, 대전을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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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남다른 자식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살림밑천이라는 큰누나만 고향에서

고등학교에 다녔고, 나머지 5남매는 서울과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소위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나도 자연스럽게 대전으로 나와
대성고등학교에 다니게 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입시 공부보다는 인생 공부에 재미를 붙여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해 부모님의 뜻과는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당시 무전여행이 유행이라 혼자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고, 그후 출간돼 읽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 2권」의 책 내용중 3분의 2는
내가 젊은 날 다닌 곳일 정도로 여행을 좋아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고3때 같은 반 친구 중에 부모님이 안 계신소위 고아인 친구가 있었는데
한동안 지켜보니 그 친구가 점심도시락을 싸오지 않고 굶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나는 며칠을 고민하다 누님한테 사실을이야기 하고
친구의 도시락을 싸줄 수 있는지 어렵게 물었다.

당시에는 둘째 누님이 대전가족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던 터라
누님의 허락이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과 달리 누님은
흔쾌히 허락했고, 덕분에 1년간 친구와 도시락을
함께하면서 많은 추억과 학창시절을 공유할 수 있었다.

나는 둘째 누님 덕분에 학창시절 미처 정립되지 못했던
나눔과 베풂에 대한 나름의 생각과 행동들을 주변 여건에
굴하지 않고 싹틔울 수 있었기에 항상 감사해 하고 있다.

민주화 운동의 한복판에 서다


1985년충남대 철학과에 입학했다.당시는 1980년 군사쿠테타 이후 장기 독재집권으로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경험했듯이 80년대의 대학가는 민주화 운동의 열기가 뜨거웠고, 사회문제에 관심이많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을 접하게 됐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나는 어느새 운동권의 중심에 서 있었고,내재됐던 나의 사회와 국가에 대한 생각들을 하나하나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학생운동은 대학 4학년에 올라가는 해인 1988년 2월에조직사건으로 1년 가까이 수배를 받는 상황에 이르는데, 당시 안희정 지사 등 많은 분들이 이 사건에 연루돼 함께 민주화운동에 나서게 됐다.
그때의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해 말 나는 전두환·노태우 구속을 촉구하며 검찰청을 점거하면서 대전교도소에 수감됐고, 그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인생 수업을 받게 된다.

노동자와 함께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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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접어들어 시민운동이 활발하던 시절, 나는 ‘충남민주운동청년연합’의 간사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시민운동에 들어갔다.
나는 위장취업을 통한 노동자의 인식을 깨우는데 초점을 두고,지금의 대화공단에 있는 휴대용 버너를 생산하는 공장에 들어갔다. 위장취업 해서 눈으로 직접 본 노동 환경의 열악함은 밖에서 인식했던 상황 그 이상이었다.
식당이 없어 공장 바닥에서 밥을 먹는가 하면, 근무시간도 들쑥날쑥으로 매일 잔업의 연속이었다.

나는 공장 노동자들과 자연스럽게 지내고자 노력했고,처음에는 꺼려하던 노동자들이 나의 말에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고, 나의 의견에 동조하기 시작했다.사업주는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그 배후에 내가 있다는 것을 안 사업주는 결국 나를 공장에서 쫓아냈다.
쫓겨난 나는 다양한 방법으로 시민단체 활동을 펼치며, 노동착취에 맞서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현실의 벽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아마 이로 인해 본격적인 현실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됐던 것 같다.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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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년 2월에 조직사건으로 수배를 받던 때 경찰의 감시가 심해져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를 수 없던 때가 있었다. 그 날도 모교인 충남대에서 친구들과 모여있던 중학교로 경찰이 밀고 들어온다는 급박한 상황을 전달 받게 됐다.

몸을 피신할 곳을 수소문하다가 고가의 장비가 있고 이중 철제문이 돼있어 경찰들도 함부로 기물을 파손해가며 침입할 수 없는 곳이 방송국이란 소리에 그곳으로 몸을 피하게 됐다.그런데 그곳에는 미처 귀가하지 못하고 뒷정리를 하던 한 아름다운 여학생이 있었고 사정 설명할 시간도 없었던지라 그대로 문을 걸어 잠그고 뜻하지 않게 그 여학생과 단 둘이 밤을 지새우게 됐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 둘은 그 이후 8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고 살게 된다.
지금의 아내는 그 흔한 투정 한 번 없이 묵묵히 곁을 지켜주면서 힘을 주었다. 그것이 나를 더 미안하게 만들었고 결국 나를 사업가로 변신시켰다. 결혼 후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제조업체인 금강산업을 설립하고,사업을 시작해 어느 정도 성공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사업가의 사업이 계속 잘될 리 만무했다.
오래지 않아 회사운영은 어려워졌고, 나는 사회변화의 꿈에 대해 다시 도전하는 일에 매진하게 됐다.

언덕에 올라 희망을 보다


30대 후반이었던 2002년경 어느 날 문득 내가 진정 가고자 하는 길이 무엇이었는지를 고민하게 됐다.
이 시절 나는 두 번째 운명적 만남을 맞이하게된다.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부터 눈에 담아두었던 정치인 노무현이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그가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당연히 나는 선거캠프에 합류하는 일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대전지역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의
경선인단을 분류하고 선거운동을 하는 일에 뛰어들었다.

지역에서 사회운동을 해왔던 나로서는 민주당 경선을 포함해 대통령 선거과정에서 마주치는 여러 상황 속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원칙과 상식,
그리고 겸손함을 지켜나가는 것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그러한 가치를 지켰을 때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다는 진리를 체험하게 됐다.

나의 30代, 청와대로


서울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청와대였다. 이력서를 가지고 올라오라는 전화였다.
노무현이란 사람이 좋아서, ‘그’라면 내가 꿈꾸던 사회변화의 길에 무언가 도움을 줄 것 같아서 그렇게 일했던 것뿐인데 그일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결국 제안을 받아들인 후 경황없이 맞닥뜨린 중앙정치는 내게 이런 고민에 빠져있을 시간적 여유조차도 주지 않았다.
38살이 되던 그 해 3월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에 임명됐다. 나는 당시 언젠가 는 우리의 진정성이 역사에 재조명될 것이라는 믿음과 나에게 닥치는 여러 시련들이 나를 더욱 단련시킨다는 생각으로 묵묵히 맡겨진 소임에 충실했고,
그렇게 청와대 생활에 적응해갔다.

나의 생각을 국정속으로


인사수석실은 국가 인사 전체 시스템을 컨트롤하는 곳으로 개인적으로 좋은 경험이었을 뿐 아니라 평소 나의 생각과 철학이 국정에 반영된다는 점에서 유익한 경험의 시간이었다.
나는 과기부와 정통부, 복지부, 여성부, 보훈청, 식약청, 기상청 등 정부 부처 및 산하기관 80여 곳에 대한 전반적인 인사실무를 보면서, 국가 조직에 대한 안목과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과학과의 만남, 유성에 성큼 다가간다


2004년 3월 나는 청와대 생활을 마무리 하고, 과학기술부로 자리를 옮겨 오명 부총리 겸 과기부장관의 정책보좌관 생활을 시작한다.
실제로 과기부 재직시 과학유성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수립했고, 이는 과학도시 유성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이후 나는 2006년에 유성구에 위치한 대덕특구복지센터 소장에 취임해 유성과의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갔다.

지방자치라는 생활정치에 뛰어들다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전시행정위주의 외향적 지방자치보다는 지역의 무너진 공동체를 일으키고 사회적 네트워크 구축과 신뢰받는 지방자치를 구현하는 생활정치를 내세우면서 2010년 지방선거 출마를 결심했다.

매우 훌륭한 인적자원을 가진 유성은 민주적 가치와 참여자치의 제도적 손질만 잘 되면 국내 어느 지역보다 매우 훌륭한 지속가능한 자생도시가 될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교육, 문화, 복지와 관련된 정책 등과 주민참여제도에 대한 계획을 꼼꼼하게 수립하기 시작했다.
2010년 6월 2일, 유성구민은 나의 믿음대로 미래를 위한 선택을해 주셨다.
토건개발 만능주의보다 ‘복지, 교육, 문화’를 추구하는 사람의 가치에 손을 들어 주셨다.

행복유성의 닻을 올리다


당선된 이후 취임식 전까지 각 부서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나는 공무원들에게 “주민들이 실생활에서 정말 필요로 하는 것과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자주 했다.
지역에서 오랫동안 공직에 몸담고 있었던 공무원들을 줄 세우기보다는 그들의 경험과 전문적 식견을 원했던 것이다. 파편화된 개인들이 모일 수 있는
가정, 직장, 이웃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 그래서 행복을 되찾게 도우는 것이 민선 5기 유성구에서 해야 할 일이라고 다짐했다.

‘함께해요, 행복유성’은 그렇게 탄생됐고, 민선 5기 행복유성은 그렇게 출범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