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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즉동은 약 3만 여의 인구가 살고 있는 도시와 농촌이 병존하는 도농복합형 도시이자 국제과학비즈니스 벨트 거점지구로서 세종특별자치시,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묵의 마을로 유명하여 전국의 미식가들이 찾았던 구즉동은 오봉산 보덕봉 등 높지 않은 뒷산이 마을을 감싸고 대청댐으로부터 흘러나온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마을로서 농촌의 인정이 살아있는 소박하고 인심 좋은 도시이며,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거점도시로서 대한민국의 중심지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백제때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 구즉면에 속해서 북쪽에 흐르는 금강에 여울이 있으므로 쇠여울이라 부르다가 줄여서 쇠일 또는 금탄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회덕군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공주군 명탄면의 신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금탄리라 하고 대전군 구즉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대덕군 편입,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유성구 편입,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금탄동이 되었다. 금탄동의 북쪽으로는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며 금강이 흐르고 있는데 물의 푸르름이 겹쳐 검은 호수처럼 보인다. 그 옆으로 금맥이 거미줄처럼 산속에 엉켜있다 하여 금정산이라고 부르는 산이 있다. 조선시대 말기부터 일정시대까지 금을 캐던 금광이 있었던 산이다.
백 제때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 구즉면의 지역으로 마을에 큰 대밭이 있으므로 댓골, 죽전(竹田), 대동(垈洞)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회덕군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오대리, 가마리, 학교리, 불노동, 상산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대동리라 하고 대전군 구즉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대덕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유성구 신동,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동이 되었다. 북쪽으로 충청북도 청원군 현도면 말미로 건너다니는 말미깨나루터가 있다. 조선시대를 비롯하여 1940년때까지만 하여도 북쪽으로 통하는 큰 나루였다. 조선시대에 사화나 정변이 있을 때 청주 감영에서 포리들이 나와 나루를 건너는 사람들을 검문하던 나루로 유명하다. 말미로 건너다니는 나루라 하여 말미깨나루라고 부르게 되었다.
백제때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때는 공주부,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 명탄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구즉면 신대리, 신흥리, 녹동리와 명탄면 신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처음에는 신흥과 녹동의 이름을 따서 신동리(新洞里)라 하고 대전군 구즉면에 편입되었는데 뒤에 신동리(新東里)라 하였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대덕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유성구 신동,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신동이 되었다. 신동 산 13번지에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된 소문성(蘇文城)이 있다. 백제가 쌓은 산성으로 유성 육성의 한 산성이다. 신동의 역사는 이 소문성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사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백제 멸망후 백제부흥군이 소문성에서 신라의 무장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군과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한다. 그 후 소문성 아래에 마을이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백제때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 구즉면의 지역으로 지형이 쇠고리 같으므로 금고리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회덕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족동, 작동, 상선리, 불노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금고리라 하고 대전군 구즉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대전부 대덕군, 1989년1월 1일 대전직할시 유성구,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금고동이 되었다. 대전광역시 관할의 금고동위생매립지가 있다.
백제때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 구즉면의 지역으로서 백제멸망후 군사들이 진을 쳤던 지역이므로 두니실 또는 둔곡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회덕군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용두리, 공주군 명탄면 계봉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둔곡리라 하고 대전군 구즉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대덕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유성구,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둔곡동이 되었다.
백제때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때는 행정단위인 박산소(撲山所)의 지역으로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 구즉면의 지역이었으나,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회덕군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박산리, 신암리, 후피리와 봉암리 작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봉암과 오봉산의 이름을 따서 봉산리라 하고 대전군 구즉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대덕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유성구,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봉산동이 되었다.
옛부터 장수마을로 불리우던 구룡동은 백제때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 구즉면의 지역으로서 지형이 구렁이와 같으므로 구렁이 또는 구료이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에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회덕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하평리, 청운리, 용두리 일부를 병합하여 구룡리라 하고 대전군 구즉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대덕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유성구,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구룡동이 되었다.
백제때는 우술군, 신라때는 비풍군, 고려때는 공주부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공주군 구즉면에 속해서 소나무가 무성하므로 송강(松崗)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년)에 회덕군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청룡리, 와룡리, 주성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송강리(松江里)라 하고 대전군 구즉면에 편입되었다. 1935년 11월 1일 대전부 대덕군, 1989년 1월
1일 대전직할시 유성구, 1995년 1월 1일 대전광역시 유성구 송강동이 되었다. 보덕봉 동쪽 일성사로 넘어가는 산길의 입구에서 구석기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송강동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부터라고 한다. 조 선시대에는 산지와 들과 강물이 아름다워 절승지로 꼽았으며, 서쪽 산악지대에는 유별나게 소나무가 무성해서 한낮에도 산에
들어가면 어두침침하여 산짐승도 많았었다. 특히 노루, 꿩이 많아서 매년 조상에게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납월인 12월달에는 전국에서 포수들이 몰려드는 사냥터로도 유명했던
곳이다.
(2023년 기준 / 단위 : ㎢)
면적(계) | 전 | 담 | 임야 | 기타 | 구 면적 대비 |
---|---|---|---|---|---|
27.47(100%) | 1.27(4.6%) | 2.56(9.4%) | 17.09(62%) | 6.55(24%) | 15% |
(2025. 1월 기준)
행정구역 | 세대수 | 인구수(명) | ||||
---|---|---|---|---|---|---|
법정동 | 통 | 반 | 계 | 남 | 여 | |
8 | 67 | 433 | 15,110 | 32,814 | 16,800 | 16,014 |
(2025. 1월 기준 / 단위: 명)
구분 | 계 | 5급 | 6급 | 7급 | 8급 | 9급 | 기타 |
---|---|---|---|---|---|---|---|
정원 | 18 | 1 | 2 | 5 | 5 | 5 | |
현원 | 17 | 1 | 2 | 6 | 6 | 2 |
(2025년 기준 / 단위: 개소)
소계 | 초 | 중 | 통합(초중) | 고 | 대학 |
---|---|---|---|---|---|
6 | 3 | 2 | 1 | - | - |
(2025년 기준)
층별 | 시설명 |
---|---|
3층 | 대회의실 / 스마트워크센터 |
2층 | 중회의실 / 세미나실 / 동대본부(별관) |
1층 | 통합민원실 / 동장실 / 무인민원발급기(1층입구) / 건강돌봄터 / 주민자치회(별관) |
지하1층 | 다목적실 / 기계실 / 전기실 |